SBI 20기 편집자반의 시 창작&낭독 동아리 [소보로빵]입니다. 그리고 저는 소보로빵의 데이먼 알밤🌰입니다. 모두 첫 메일링 재밌게 읽으셨나요? 소보로빵 동아리원들도 메일링이 처음이라 무척 떨렸는데,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귀여운 답장을 보내 주셔서 감동받았고… 또 힘을 얻었습니다.
알밤은 저번 합평이 끝나고 1) ‘노동’이라는 키워드와 2) 차이밍량 영화 <하류>의 한 장면을 주제로 골랐습니다. '노동시'의 시대는 저물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노동하며 살아가고 있죠. 소보로빵 친구들은 노동시를 어떻게 쓸까? 보고 싶다! 그런 생각에 ‘노동’이란 키워드를 내게 됐습니다. (친구들을 고통받게 만들었네요.)
<하류>는 알밤이 좋아하는 영화예요. 소보로빵 동아리원들이 같은 장면을 보고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 시를 썼는지 비교해 가면서 읽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요.
중요한 소식 하나! 지난 메일링 때 소중한 독자 시가 도착했습니다. 독자 시와 기린의 코멘트는 아래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 앞으로도 많은 독자 시와 리뷰를 기다릴게요.
🍫 노동
🥚 차이밍량 영화 <하류>의 한 장면
차이밍량의 영화 <하류> 속 한 장면
하류
데이먼 알밤
하류에는 온갖 생활 오수들이 모여들었다 그곳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몰랐다 나는 종종 그곳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곤 한다
바깥에는 일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내게 더 들어가 달라고 부탁한다 하얀 옷은 계속 피부에 달라 붙고 옆에는 나와 비슷한 모양의 생명체들이
이렇게나 비슷하다니 두렵다
집에 가면 바로 씻어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코로 숨 쉬지 않기 위해 애쓴다 물속 깊이 들어간다
앞이 흐리다
어디선가 수고하셨다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온다
이제 하얀 옷은 강과 구별되지 않는다
🌰 데이먼 알밤의 시작노트
저는 강의 이미지를 좋아합니다. 그중에서도 더러운 강의 이미지를 좋아해요. 그래서 차이밍량 감독의 <하류>나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 오카자키 교코의 『리버스 에지』 같은 작품들을 정말 좋아합니다. 이 시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하류>의 한 장면에서 출발했는데요. 쓰다 보니 어느새 예상치 못한 곳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길을 잃는 것. 제게는 시를 쓰는 큰 즐거움 중 하나예요.
무빙워크
부스럼
오늘은 사과 반쪽과 지중해식 오이샐러드를 먹었지
모델의 보이지 않는 노력은 돈이 되는데
내가 오늘 라떼 대신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신 건 무엇이 되어 돌아올까
휴일이면 모델은 화장을 하고
영화관에 간다
어두워서 옆사람의 얼굴도 보이지 않지만
하얗게 피부 화장을 한 시체
화장터로 들어가는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저 배우… 다양한 배역을 하고 싶다 했지
완벽한 베이스메이크업에 모공이 보이지 않는 피부
시체의
노화를 막는 기술
저 배우는 죽은 자를 연기하기 위해 밤새 연습했다
죽은 자를 완전히 늙어 보이게 하지 않으려고 밤새 팩도 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시체가 바른
립 어디 거지?
영화는 편집의 영역이며
빼는 것이 중요하다
런웨이에서 빼는 것들을 떠올려본다
이를테면 그래
우리가 허파로 숨 쉬는 사람이라는 거
모델은 옷을 벗을 때마다
두꺼운 옷을 껴입는 듯한 느낌에 시달린다
나는 무빙워크를 탈 때마다 런웨이를 걷는 느낌에 시달린다
배우는 밤마다 카메라 렌즈를 껴안고 잔다는 느낌에 시달린다
보고 싶지
않아
보면서 최대한 보지 않으려고
모델은 영화를 볼 때면 항상 좌우 구석 자리에 앉는다
모델이 배우에게 보이는 최소한의 예의
시선을 자막에 맞추고
시체를 연기하는 배우의 표정을 보지 않는다
시체는 분명 눈을 감고 있겠지만
자막에는 시체가 생전 읽었던 책의 인용구가 흘러나온다
그래서 모델의 상상 속에서 시체는 여전히 살아 숨 쉬며
책을 읽고 있다
관의 문짝이 닫히고
관 안에서 모델이 몰래 윙크를 했다는 사실을
영화가 끝난 뒤 인터뷰 영상에서 보았다
🌀부스럼의 시작노트
이 시는 “꾸며서 보여주기(배우) 대신에 존재하기(모델)”라는 로베르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라프에 대한 노트』의 구절에서 시작됐습니다. 노동이라는 주제를 듣곤 바로 보여지는 것과 보는 것을 생각했어요. 우리는 얼마나 보여지는 노동을 하는가? 보는 것도 노동이 될 수 있지 않는가? 존재 자체가 노동이 되어버린 사회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돈이 부족해서 투자 못한다는 건 다 핑계입니다
최파란
월급 150을 받고 20만 원짜리 기타를 사러 간다 보낼 테니까 그만 전화해 이걸 사면 130이 남고 거기서 40은 월세 이번 달 전화 20분 남았어 동생에게 70을 보내면 20이 남는다 5는 공과금 동생은 도움과 돈을 번갈아 찾고 5는 교통비 10으로 한 달을 산다 버스 정류장에서 공짜 와이파이를 낭비하며 일자리를 구한다
알바가 끝나면 컵라면과 감동란 사이에서 오늘 나의 가치를 매겼다 좋은 날이 오면 감자칩도 먹을 것이다 다짐하면서 젓가락을 갈랐다 딱 하고 부러지는 날이 잦았다 그런 건 안타까움도 아니었다
기타를 사지 않는다면 밥을 먹을 수 있겠지 파인 다이닝인지 오마카세인지 10만 원에 팔 테니까 어쩌면 커피를 마실 수도 있다 삼성을 살까 애플을 살까 지금 전화가 와서요 하지만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기타 치는 법 알려줄까?
줄을 튕기면서 노래를 부르고 말없이 숫자를 외울 수도 있을 것이다 낯선 이의 호의를 거절하면서 기타를 안고 도망쳐 나오는 까다롭고 완성되지 못한
F코드
지하철에서 옆에 앉은 사람의 문자
너무 힘들어요 이곳은 지옥입
곯아떨어져 머리를 기대오는 여자
다리 사이에 낀 기타가 숨을 헐떡이고 점점 부서져
내릴 준비를 한다
다 휘청거리고 덜컹이는 밤
기타 혼자 줄을 튕긴다
독
창
적 죽
코이
드는
로
누구도 깨지 않을 모닝콜을 연주한다
일어나지 마라 너희가 모두 자야 내가
산다
🌀최파란의 시작노트
정말 궁금해서 여쭤보는 건데요, 혹시
감동란이 식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식사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비싼 겁니까.
월급 200만 원 받고도 집에서 내내 라면 먹은 적.
얼마를 벌어야 충분할까요.
F코드는 너무 어렵고 세상에는 코드의 개수만큼 못된 사람이 많아요.
하지만 모른 척 어깨라도 내어주는 사람이 있지요.
눈을 떴을 때 온기가 느껴지면 화들짝 놀라 사과합니다.
사실은 고맙다 말하고 싶었는데요.
다 같이 누워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상상.
싸고 맛있고 영양가 있는 밥을 열심히 먹는 상상.
당근 마켓을 취미로만 하는 상상.
타인의 제안이 모두 호의가 되는 상상.
호잇!
다이브
임기린
다 집어치우고
뛰어들고 싶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열차 안에서
나의 공간을 확보하는 법
빼곡하게 밀려드는 사람들에
섞이지 않는 법
옆에 선 남자의 살이 닿는다
뜨거워
서울의 지하철 창문은 위태로운 상황을 대비하여 모서리를 가격했을 때 쉽게 깨지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지근거리에 있는 무겁고 예리한 물체로 창문을 깨고 탈출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창문만 본다
너무 가까워서 다 보여요
당신이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는 메시지의 내용과
오늘 점심의 메뉴
당신의 투두 리스트가 얼마나 실패했는지
그 실패의 목록을 당신이 얼만큼 껴안고 있는지
알아요 안다고요
그러니까 내게서 떨어지세요
강의 수면은 질긴 가죽 같다 뛰어들면 깨지는 쪽이 나일 것 같다는 생각 산산이 조각나 수면 위에 흩어진 채 합정에서 당산을 오가는 2호선의 이용객 모두가 내 파편을 관람할 것 같다는 생각
을 하자마자 열차는 터널로 진입하고
창문을 보던 사람들은 별안간
검게 닫힌 창문에 비친 표정을 목격한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임기린의 시작노트
저는 20살에 상경해서 지금껏 서울을 버티며 살고 있는데요.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서울은 참 이상한 도시입니다. 누구나 소속 되고 싶어 하지만, 정작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사람들은 죽지 못해 살아가는 요상한 곳이죠.
매일 아침과 저녁, 저는 2호선의 빼곡한 사람들 틈에 적재된 채 당산철교를 지납니다. 그럴 때면 내 옆구리에 닿은 모르는 남자의 뜨거운 뱃살에 기분이 더럽다가도, 창밖의 물결을 보면서 문득 슬퍼지곤 합니다. 어쩔 때는 살을 맞댄 남자가 제 동지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이 시는 그런 지하철 안에서 떠오른 한 문장에서 시작한 시입니다.
다 집어치우고 뛰어들고 싶다.
0
구보
1.
남자는 귀가 아주 밝았다 그래서
물 알갱이를 포집하는 사막살이들처럼
면접장에 가지 못한 목소리들을 모았다
목소리들은 몸에 흐르다
말라 붙었고 그 위로
새로이 모아진 목소리들이 흘렀다
피부에 조용히 퇴적된 목소리들에
이미 불이 붙어있었다는 걸 알아챈
눈에 배고픔도 잊은 목소리가 고이고
남자는 불꽃에 고통을 붙이기로 한다
2.
먼 미래에서 나는 불타는 남자에게 말을 건다
: 당신이 타오르기 전으로 이 세상은 돌아갈 수가 없어
내 목소리를 포집한 남자는 나와 눈을 맞추고
나에게 작은 불씨를 보낸다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
👓구보의 시작노트
‘아무튼,’이 붙은 에세이 시리즈를 아십니까. ‘아무튼, 택시·순정만화·하루키·데모…’ 정말 다양한데요 ‘아무튼, 노동’은 없습니다. 왜 없을까요. 쓰다 보면 빼놓을 게 하나도 없고 빼다 보면 내가 다룰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고 느껴져서가 아닐까요. 어떤 시를 쓸까 생각하면서 정말 머리가 터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0으로 돌아가는 느낌으로 전태일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누구라도 전태일을 알게 된다면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해요. 54년이 지난 지금 그의 귀에 가닿고 싶었습니다. 먼 미래에도 누군가는 저와 같은 마음이겠죠. 그가 더 이상 배고프지 않기를.
허밍
김민혁
더빙된 세계는 노래로 가득 차 있다
네가 코로 내는 발음들을 차례대로 줄세운다
숨이 막힐 때 비로소
너를 불신하고 싶다
이것은 명령이다
따라 말하면 이상해지는
물속에서 눈을 뜬다
검은 머리카락 가닥마다 각각의 수수께끼
너는 던져도 되돌아오지 않는 질문이다
돌
너의 휘파람 소리
기념일에만 들을 수 있는
유한한 거북들을 남겨두고
새로 산 노트에 가득히 꽂힌 인덱스
자꾸 허물어지는 허리
잘 살아 보자고 다짐했을 때
촛불이 둥글게 타올랐다
📝독자 시 코멘트
"오늘도 나는 강에 돌을 던지고 왔다. (…) 강이 돌로 메워진다면 그만둘 생각이다."
차도하_「돌 던지기」
우리는 왜 질문을 '던진다'고 말하는 걸까? 시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질문이 던져졌다면 날아갔을텐데. 어딘가에 떨어졌을 텐데. 답을 돌려받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부메랑이 아니어서 나를 떠나 멀어져버린 것을, 나는 어떻게 되찾을 수 있나.
고민을 하다 보니 답은 없고, 그냥 걷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떨어져 있을지 모르지만, 망가졌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답을 찾고 싶다면 질문을 던진 방향으로 걷는 수밖에.
마지막 연의 "잘 살아보자"는 다짐은 제게 일종의 질문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시가 끝난 지점에서 잘 살아보자는 질문의 답을 찾아 걷는 사람을 떠올렸습니다. 그렇게 떠올린 사람의 모습 속에는 내가 보이기도 하고, 내 옆에 앉은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좋은 시를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 걷는 길은 지난하고 외롭지만, 그 길을 걷는 누군가의 허밍을 듣는 일은 왠지 위안을 주는 것 같네요. 앞으로도 좋은 시 써주시길 바랍니다 :)
write by. 임기린
🥯소보로빵 부스러기들의 일상을 소개합니다!
소보로빵이라는 동아리명을 짓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소보로를 볼 때면 서로를 떠올리고 있어요.
구보는 부스럼에게 파리바게뜨에서 소보로빵을 사 와 주었고, 알밤은 동네 빵가게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소보로빵 사진을 찍어 단체 메시지에 보내줬지요. 부스럼은 제주도로 여행을 가서 부스러기들에게 줄 당근 소보루 파이를 샀답니다.
무언가를 보고 떠올릴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생각하게 되는 여름날이네요.
그러니까 '별명'의 이점은 이런 거지요.
"네 생각 나더라"
그래서 소보로빵의 메일링 2회차 기념을 맞아 독자 이름을 정했습니다! "빵먹자"or"빵독자"가 입후보한 구독자명이에요! 혹시 더 좋은 애칭이 있다면 구글 폼으로 많은 의견 남겨주세요:)
더불어 이번 메일링을 읽고 남기고 싶은 글이나 시, 피드백이 있다면 언제든 구글 폼에 남겨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