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먹자 선생님들, 다들 잘 지내셨나요? 추석 연휴를 건너뛰고 오랜만에 만나네요. 다들 환상적인 가을 날씨에 산책을 많이 하고 가을 제철 음식을 먹고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빵먹자들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겠네요. 저번 메일링을 읽으셨다면 아시겠지만, 이번이 소보로빵에서 보내는 마지막 메일링입니다. 벌써 SBI 학교의 일정도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고, 10월 18일 교육발표회를 마지막으로 저희들은 각자의 자리를 찾아 떠날 예정입니다. 아쉽지만 여기서 정말 끝은 아니라는 마음으로 빵먹자들에게 마지막다운 메일링 주제 ‘졸업’과 마지막’의 시를 띄웁니다.
마직막 메일링이라 주제가 ‘마지막’이라니 조금 진부하다는 생각이 드실지도 모르겠지만, 자부하길 이번 메일링은 역대급 따스하고 애달픈 시를 선보일 겁니다!
🥖 마지막
💧 졸업
시인의 말
─소보로빵 헌정 시
부스럼
난 이별에 약하다 명절날 내가 헤어지기 싫어서 했던 행동들 휴대폰 충전기 잃어버린 척하고 찾기 어른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거실에 나가지 않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 어른들처럼 다가오는 이별과 눈 마주치지 않기
너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우리가 헤어지면 안 되는 이유 백 가지 말하려다가 실패한다 너는 이미 우리가 헤어져야 하는 백 가지 이유를 알고 있다 우리는 당시의 대통령이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그 어느 때보다 총명했다
어제는 술집에서 문득 맞닥뜨린 외로움이
오늘은 산책하며 팔을 마구 흔드는 간격 사이에
외로움이 나에게 손짓한다
쓰러질 것 같아
어떤 사람은 돌아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찍고
어떤 사람은 시를 좋아하고 그보다도 더
고양이와 개를 하얀 새를 사랑한다
멀건 죽음을 앞에 두고 가장 먼저 내 생각이 났다는
네가 울 때 숙이는 등의 각도가 좋다
쓰다듬기 좋아서 계속 다독여줄 수 있다
천 페이지의 책을 펼치면 양 페이지가 꼭 네 등처럼 부풀어 오르고 쌀알 같은 글씨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다 보면 좋아서 한숨이 나온다 페이지를 넘기는 게 슬퍼서 잠시 고개를 든다 다시 페이지를 마주한다 눈은 길을 잃고 결국 다시 왼쪽 페이지의 첫 줄부터 읽기 시작한다
이미 했던 이야기
또 해줘
🌀 부스럼의 시작노트
빵먹자들은 헤어지기 싫어서 했던 사소하고 귀여운 행동들이 있나요? 전 어린 적부터 이별에 취약했어요. 이별보다는 미련하기, 떼 쓰기, 매달리기를 더 잘했습니다. 성인이 된 지금도 어떻게 하면 이별을 잘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 이별을 못하는 것보다 ‘잘’이라도 하는 게 좋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 정도겠네요.
그러니 이별을 잘하기 위해 조금 길게 마지막 시작노트를 써보겠습니다.
먼저 소보로빵의 부스러기들... 너무 고마웠어요. 여러분들 덕분에 시를, 2024년의 봄과 여름을 무사히 날 수 있었습니다. 아마 가을도 그 힘으로 웃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빵먹자들에게. 꾸준히 빵먹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마웠어요. 빵먹자들이 보내주는 시 감상평, 창작 시들을 읽으며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행복한 격주 금요일을 보냈습니다. 빵먹자들의 응원이 없었다면 메일링을 끝까지 할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감사합니다. 정말...
아직 저희들의 이야기는 끝이 아니지만, 설령 끝이라고 해도 이 이야기는 이미 했던 이야기더라도 계속 듣고 싶을 것 같아요. 모두들 건강하시길...
미상의 화석들
데이먼 알밤
나는 미루고 있는 중이었다
설거지를
비타민 먹기를
생일 축하를
유산소 운동을
이력서 쓰기를
잠에 들기를
작별 인사를
미루다 보니 해야만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나는 어느 날 화석으로 발견되었다. 화석이 된 사람들의 마지막 순간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학자들의 연구에는 규명이나 추적 같은 말들이 붙었다. 일하던 사람과 잠자던 사람은 보통으로, 나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미상으로 분류되었다. 나는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기를 기다렸다. 학자들은 형태가 온전한 화석을 선호했으므로. 기다리는 동안 도처에 누운 미상의 화석들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고 있나요. 곧 불리리라 생각됩니다. 직접 이름을 묻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이름을 알게 되면 그 이름을 부르고 만져 보고 싶었을 것이므로.
🌰데이먼 알밤의 시작노트
빵먹자들, 안녕하세요. 이번이 빵먹자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시네요. 시원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미상의 화석들」은 폼페이 유적의 이미지에서 출발한 시예요. 세상엔 다양한 마지막이 있겠지요. 저는 자주 그 마지막을 미루고 미루려 하는 사람이에요. 아아…… 우리의 이별도 미루고 싶어라. 그동안 알밤의 시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메일링이 끝나도 계속 곁에 시를 두고 살아가기로 약속해요.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방과후
임기린
종이 울리고도 하교하지 않았지
창밖으로 쏟아지는 친구들
너무 많아서 징그러운 친구들
반에는 나 혼자야
화단의 선생님은 벌써 세 개비째 담배에 불을 붙이고
우리가 심은 꽃들은 조금씩 짓밟히고
친구들 전부 떠난 학교
집에 가기 싫은 애들이 운동장을 차지한다
운동장을 바라볼 수 있는 아주 큰 연립식 주택의 빼곡한 창문들
그 어두운 구멍 속에서 눈빛이 반짝이고
나는 보란 듯이 일어서서 그네를 탔지
바람을 시원하게 나를 중심으로 갈라졌어
모두가 나를 더 잘 봐주었으면
나를 더 크게 부러워해 줬으면
크게 그네 삐걱일수록
하나 둘 창문 열리는 소리 들려오고
팔이 부러지러면 어떤 시점에 줄을 놓으면 될까
얼마나 더 강하게 발을 굴러야 할까
빨간 하늘에 조금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는 그네 위에서
나는 그런 고민을 할 뿐이었지
추락하고 싶다
크게 다쳐서 깁스를 하고
딱딱하고 냄새나는 내 팔에 알록달록 낙서를 받고 싶다
이런 생각은 친구들끼리만 하는 비밀인데
왜 비밀이냐 하면 그런 건 나쁘고 역겨운 것이라고
연립주택에 사는 지은이 엄마가 말해주었는데
매일 같이 그네 타던 지은이는
그 뒤로 매일 정시에 하교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아예 학교에 나오지도 않게 되었지
지은이 이제 없고
지은이 없는 학교에 남은 아이들은
지은이 책상에 열심히 낙서를 하고
나는 그게 부러웠다
모두가 지은이의 책상에 적어넣었던 빼곡한 낙서
모두의 관심과 사랑
다시 보고 싶다는 거짓말을 또박또박 책상 위에 적어두었지
그 책상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다시 볼 수 있다면
내 글씨를 지우고 싶다
알아볼 수는 없을 테지만
하늘은 금세 어두워져
욕탕에서 참기 대결 하듯
학교에 남은 애들은 시간을 버틴다
울 것 같은 기분 속에서
하나 둘 닫혀 가는 창문들 속에서
가로등 불 켜지고
우리는 이제 자존심 때문에 내려갈 수 없는 그네 위에서
점점 거대해지는 그림자를 보고 있을 뿐이었지
두려움 속에서
모두가 나를 잊은 것만 같은
우울한 밤 속에서
🦒임기린의 시작노트
소보로빵의 기린으로 보낸 시간이 참 행복했어요. 시를 쓰는 시간도 행복했지만, 부스럼, 알밤, 파란, 구보와 함께 모여서 커피를 마시고, 서로의 시를 서로의 목소리로 듣는 그 시간들이 너무 소중했어요. 출판 학교의 시간을 돌아볼 때 어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 같기도 해요. 늘 방에서 혼자 시를 쓰고 혼자 읽기만 하던 제가,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 시를 나누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 시를 소개할 수 있었던 건 참 행운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이번 시는 제가 시를 쓸 때 하는 많은 고민을 생각하면서 썼어요. 내가 왜 시를 쓰기 시작했는지, 시를 쓸 때 왜 머뭇거리게 되는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최대한 솔직하게 쓰려 노력했습니다.
이 노트가 소보로빵의 기린으로 쓰는 마지막 노트라는 것이 아직 잘 믿기지 않지만, 끝까지 저희 목소리를 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빵먹자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지만 우리와 함께 해줘서 고마웠어요. 레터는 끝나지만 우리가 남긴 시가 여러분께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 저는 이만 가볼게요. 그럼 안녕 :)
커튼 콜
구보
여름이 다 간 줄 모르는
매미처럼 살고 싶다
영화가 끝난 영화관에서
여러 명의 GV 빌런들이
서로 얼굴을 붉히다가 갑자기
반주가 흐르고 노래를 시작하는
나는 그런 뮤지컬을 꿈꾼다
마치 여기까지가 영화라고, 혹은
(이 부분은 영화사의 요청에 따라
삭제되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그러나 매미가 몰라도 여름은 가고
나는 계단 없는 육교를 오르며
걸음보다 빨리 멀어져 가는
매미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혹은 그런 이미지를 상상했다
끝을 감각하지 못한 그 소리들은
작아지고 작아져서 어디로 갈까
작은 소리를 듣는 훈련을 한다
3연의 2행에서 어떤 소리가 난다
👓구보의 시작노트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닌데요, 이렇게 끝을 딱 정해 버릴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끝을 정해 버려서 더욱 끝나지 않는 뭔가가 있을 수도요. 일단 있다고 하고 그게 뭔지는 나중에 생각해 봅시다. 함께 시 쓰고 읽었던 소보로빵 친구들 고마워요. 여러분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들입니다. 부스러기들, 지금까지 저희들의 시를 읽어 줘서 고마워요. 여러분의 어딘가에 우리들의 시어들이 남아 있기를. 안녕!
구보와 기린과 부스럼과 알밤의 시
최파란
안녕 하고 말하면 안녕할 것 같아 그냥
그런 기분이다 기분이 그래
인사하고 싶었는데 인사하지 못했다 손에 자꾸 땀이 흘러서
악수하지 않았다 축축하고 싶지 않아서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다음!
만남에는 언제나 헤어짐 따르는 법
둘은 친구라서 같이 간다 안녕
만남도 헤어짐도
나만 여기 두고
ㅉ
ㅜ
ㄱ
웃어야지 아무래도?
내일을 기약하는 아이들처럼
또 만나자 만나서
같이 놀자 내일도 모레도
그래도 될까
친구 하고 싶었어 별거 아니지
그래서 친구냐고 묻고 싶었어
내 차례를 기다리면서
작별 인사 이번에는 내가 하고 싶다
친구야, 친구야?
미끄러지기 좋은 손바닥이다
축축하게 뽀뽀하고
이별을 고하기 좋은 놀이터
안 그런 적 없었어
응 하면 안녕 할 수 있겠어
웃으면서 내일도 모레도 다시 만나
기약 있는 인사를 할 수 있겠어 너의 안녕을
빌어줄 수 있겠어
그래도 돼?
🌊최파란의 시작노트
소보로빵에 들어오기 전까지 저는 아주 오래 시를 쓰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재빠르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앞으로 시 쓸 일은 없지 않을까 생각했답니다. 그러나 지금도 시를 쓰고 있네요. 사랑은 재빠르게 도망갔다가 총총 돌아오기도 하나 봐요.
이 시는 구보와 기린과 부스럼과 알밤이 썼습니다. 구보와 기린과 부스럼과 알밤 덕분에 저는 다시 시를 쓰게 되었으니까 틀린 말 아닙니다. 네 명이 없었다면 이 시는 없었겠지요. 그러니 정말로 구보와 기린과 부스럼과 알밤의 시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구보와 기린과 부스럼과 알밤을 떠올리며 썼습니다. 넷에게 쓰는 편지를 떠올리자 오 분만에 술술 문장이 이어지더라고요. 더 건드리면 마음이 퇴색될까 싶어 초고 이후 만지지 않았습니다. 좋든 싫든 이건 네 명이 쓴 시. 아름답든 못났든 이건 네 명을 위한 시. 혹시 빵먹자 선생님들이 서운하실까 걱정도 되지만 그래도. 그래도요. 이해해 주실 수 있죠?
빵먹자 선생님들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누군가 나의 글을 읽고 있다는 감각은 얼마나 소중한지요. 내가 쓴 시를 읽고 발음해 보는 사람이 있다는 건. 나 이런 호사를 누려도 괜찮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고마웠어요. 기회가 되면 우리 또 만나요. 또 쓸게요.
다시, 구보와 기린과 부스럼과 알밤에게. 사실 우리는 아직 이별 아니지만. 그래서 같이 술을 마시고 떠들며 집으로 뛰어갈 때 나는 깔깔 웃을 수 있었지만. 이 글을 적고 있으니 어쩐지 이별 같기도 합니다. 마지막은 아닌데요 마지막 같아서 슬퍼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남은 약속이 많이 있고. 나는 그 약속이 다 지켜질 때까지 당신들을 놓아줄 생각이 없거든요. 만나는 내내 우리 이제 친구냐고 묻고 싶었어요. 그래도 되냐고. 안 그런 적 없었고요. 당신들이 응 하면 저도 안녕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영원히 당신들의 안녕을 바랄 거고요. 내일을 기약하는 아이들처럼.
또 만나자 만나서
같이 놀자 내일도 모레도
🌟🎤 히든시어 당첨자 공개🌟🎤
저번 메일링의 특별 참여 이벤트였던 '히든시어'를 향한 많은 참여 감사합니다. 정답을 맞히신 분이 한 명밖에 없으셔서 그분에게 개별적으로 소보로빵을 전달해드리는 것으로 이벤트는 마무리하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편집자반 반장 이한얼님! 역시 반장이라서일까요? 편집자반 한 명 한 명을 잘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진심으로 한얼 언니가 상품을 받게 되어 기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소보로빵은 그 어떤 힌트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